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결집 (문단 편집) == 상세 == 마하가섭이 주관하고, [[아난다]]가 먼저 암송하면 모두 따라서 합송하는 형식으로 교리를 완성하였다. 특히 아난다는 교리 부분을 암송한 반면, 계율 부분은 우팔리가 선창을 담당하였다고 전한다.[*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1~42쪽] 대당서역기는 이때가 안거의 첫 보름(즉 안거 시작 전날인 5월 15일)이었다고 적었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석가모니는 제자 아난다에게 '자등명법등명'으로 알려진 유명한 법어에서 '''내 입멸한 후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다'''고 단언했다([[석가모니/일생]] 항목 참조). 석가는 입멸하기까지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쉬임없이 노력하면서도 승단의 지도자를 자처하지 않고 오로지 유익한 조언을 해주는 것으로 만족했고, 특히 이곳저곳 떠돌면서 일상사의 이런 저런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불자가 아닌 사람들의 가혹한 비판을 감당해야 했던 승단의 수도승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승단에서도 석가모니가 생존한 동안에는 불법이 건재하므로 우선 포교와 덕행으로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석가모니 생전에 승단은 급속히 팽창했지만 일원적 조직체계를 갖추지 않고, 오히려 규모가 서로 다른 여러 세력으로 구성된 편이었다. 이들은 같은 믿음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는 있었지만, 각 지역 문화의 개별적 영향 때문에 공통된 계획이나 공식적인 강령 등은 없었다. 더구나 석가 자신이 '내 입멸 뒤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기에, 석존이 사망하자 각 세력은 더욱 중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석가모니의 설법을 한 데 모아 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을 한층 가속화했다. 게다가 어느 한 제자가 석가모니의 모든 가르침을 듣고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가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 세존의 언행을 한데 집결해야 하고 1. 승단 내부의 분열[* 이런 현상은 석존 생전에도 이미 기미를 보였다. [[데바닷타]] 항목 참조.]과 논쟁을 끝내기 위해 승단의 계율을 집대성,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이 필요함은 누구나 동의했다. 이제 중대한 과업을 수행할 적임자를 찾는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4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